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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석천암 (남양주) - 불암산정암사불암산남양주 이시카와암불암사천보사노원학도암이윤택 한글영사벽진이씨 충주쿠 공파구 서울 서울

by korean-macgyver 2025.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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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암 (남양주)

여행 일정: 7:28 신중동역 8:51 조계역 9:16 시와이지 9:53 파치파치 10:14 불암산 10:47 불암산장 10:56 이시카와바위 11:20 불암사 11:50 덴포지 12:11 능선 12:24 학도암 분기 12:30 학도암 12:46 노원교회 1:04 이윤택 한글영토 1:14 1:47 과기대 1:54 구서울공대다산관 2:08 서울산업대대륙관 2:25 공릉역 3:42 신중동역 ================================================= 시즈와지 입구: 오늘은 불암사를 중심으로 불암산 지역에 있는 문화재를 방문하고 있습니다. 상계동역으로 내려서 먼저 정암사의 길을 따라 올라간다. 청암 2단지 아파트의 담을 사이에 두고 올라가는 시즈이와지의 표시판을 따라 산길로 들어간다.

 

우선은 시즈이와지의 표시판에만 따른다.

 

서울 주위 도로 갈라진 길 : 서울 주위 도로 표시판이 나온다. 불암산도 몇번이나 올라갔고, 서울 주위 길도 몇번이나 다니는 길이라고 친숙한 장소다.

 

이 주위의 해골 자물쇠는 여전히 눈에 띈다.

 

서울 주위길 갈라진 길 : 잠시 만난 서울 주위길은 여기서 또 헤어진다.

 

정암사 문화재 표시판 : 등산로변 정암사축대 옆에 처음으로 문화재 표시판이 세워져 있었다. 문화재청의 자료에는 아미타 칠전도는 소재지가 시즈이와 절이 되어 있는데 비해 기념 미타도 참참법은 소재지가 로하라구뿐이지만, 여기의 표시판에 함께 있는 것을 보면 양쪽 모두 시즈이와지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각을 둘러봤지만, 아미타 7전도는 어디에 보관하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서울시즈이와지 아미타 칠존애(서울 숙암사 아칸타 칠존애) : 서울특별시 문화재 자료 제54호 기념 미타도 참참법권 110(요념 야스이도도 懺懺法卷一十):타입 문화재 제322호 아미타 칠존지마 : 붉은 실크의 바탕에 은물감으로 그린 ​​선묘 불화로 자주 홍해라고 불리는 불화이다. 정사각형 화면에 아미타블과 4보살, 그리고 불쌍과 아난이 둥글게 둘러싸인 원형 구도로 화면 상단 좌우에 화염과 보살상을 추가했다. 부살상은 딱딱한 얼굴에 이목구비는 줄이지만 전체적으로 우아한 인상이다. 선배 불화는 필선이 나타나기 때문에 우수한 기량을 가진 화승들이 그리게 되지만, 이 불화는 19세기 전국적으로 화명을 날려버린 화승천여가 1833년에 그린 불화로 화기에 의하면 칠불사 김정암에 봉안한 것을 알 수 있다. 긴쇼도 천여, 은 전남 승주 센포지 절에서 주석해 수많은 불화를 그린 19세기의 유명한 화승이다. 대가의 작품답게 필선이 날카롭지만 힘이 있어 섬세하다. 유려한 옷 주름의 필선과 섬세한 모양 등 19세기 불화 중에서도 격조가 높고 완성도 있는 불화로서 문화재 자료의 가치가 있다. 화면의 일단부와 배접지가 엉망이 되어 오랫동안 말려있던 것처럼 화면에 부러진 흔적과 주름이 많아, 하단 부분은 찢어진 상태로 보존 상태는 불량하지만, 향좌측 보현보살이 가지고 있는 연꽃과 아난산의 머리에 칠해진 가채. <화기> 「도광 13년 왓츠미」월일 경조 후불아」우시치부지 절 봉안우「니시키이안」 퇴학 대선사 「별자정 유금 금붕어 금암 천여 圓潭乃元」정화 「우아쿠」 대시주 청담당 성해 공양주 성인 대현 유나 와미오오

 

이 불화는 화기가 남아 연대와 작가를 확실히 알 수 있어 작례가 드문 홍환이라는 점에서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54호로 지정됐다. 기념 미타 도량 참법 : 참법이란 경전을 읽으면서 죄를 간회하는 불교 의식을 말하며, 미타 참법과는 서방극악 정토의 아미타 불을 대상으로 한 참법을 말하지만, 한국에서는 삼국 시대부터 크게 번성했다. 이 책은 나무판에 내용을 새긴 후 오리지에 찍은 것으로, 권 1에서 권 5까지를 1개로, 권 6에서 권 10까지를 1개로 정리했다. 기념 미타도 참참법은 아미타불을 정성스럽게 숭배함으로써 극악왕생을 염원하는 의식을 수록한 책으로 중국의 금나라의 거장왕자성이 맺은 것이다. 인경 당시의 시주는 중간서문 뒤에 인경시 주각정구구현 현경시주 覺輝比丘爲顯妣柳氏靈駕) 등의 기록으로 알 수 있으며, 이러한 기록은 제1개에 1개소, 제2개에 2개소이다. 이 책은 간행연도를 알 수 있는 발문 등의 기록은 없지만, 동종의 판본과 서지적인 형태를 비교해 보면, 1474년(성종 5)에 간행된 보물 제949호(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형태적인 특징은 거의 같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난외로 각 수의 이름이 새겨진 편인데 간행된 직지사 소장의 보물 제1241호(권 0의 1개)가 있습니다만, 권미의 발문에 「히로지 16년 䙥亥暮春上澣直指寺老衲年系海母春上韓職知事老納等曲学七十二世西友像」라는 기록이 있어, 15 이 책의 제1본의 권리는 인경 당시의 역할을 나타내는 ‘하주 6만, 별자봉은, 인장유색조옥(화주 육만, 별좌봉은, 印莊有赜照玉)’ 등의 묵시가 있다. 그런데 고양시 하라카쿠지 소조모토(동일한 판본으로 10권 2개 완성)에도 이와 유사한 묵시가 있지만, 제2개의 권미에는 하주 6만, 별자봉은 인장 유색(화주 6만, 별자 봉은, 印莊有赜)이다.

 

따라서 이 책과 하라카쿠지 소조모토는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인물에 의해 당겨진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양자간의 내·외형적 상태로 보면, 이 책이 하라카쿠지 소조모토보다 먼저, 보다 구체적으로는 적은 수년, 대부분은 수십년 전에 인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라카쿠지 소쿠라모토는, 제2개의 권리에 「건류 삼십이년 丁亥五月日海印寺印來〔건류 삼십이년 정년 오월일 해 인사」」라는 묵시가 남아 있어, 이 책이 에 해인사에서 인쇄한 판본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하라카쿠지 소조모토 이전의 18세기 중기 무렵에 인쇄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전국사찰소장목판집》에 따르면, 기념 미타도량참법목판은 해인사에 1종(총 111판)만이 완전히 전한다. 그러나 해인사의 목판은 시즈와지 소장본과 서지적인 형태가 다를 뿐만 아니라 묵재가 1576년(만력 4)에 쓴 발문이 있다고 보고 이판본이다. 따라서 시즈와지 소조모토의 목판은 전하지 않는다고 판단된다. 위의 사실에서 보면 시즈와지 소조모토는 학조의 발문은 없지만, 1503년(연산군 9)에 1474년(성종5) 사이 책을 거듭한 목판으로 18세기 중기에 후쇄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인경자가 완성한 하라카쿠지 소조모토에도 학조의 발문이 없기 때문에 시즈이와지 소조모토는 원래 학조의 발문이 없었다고 판단된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간행연도를 판단할 수 있는 발문 등의 기록이 없지만, 동종의 판본과 서지 상태를 비교해 본 결과, 1503년경에 다시 태어난 목판으로 18세기 중기에 후쇄한 판본인 것을 알고, 동일판본이 고양원각서 서울 위키피디아

 

지금까지 우리는 절 앞을 지나면서도 갑이 아니면 그저 지나서 산에만 올랐지만 오늘은 문화재가 목표이기 때문에 시즈이와 절에 올라간다.

 

시즈와지:

 

정암사에서 바라본 노원구는 아파트에만 보인다.

 

시즈이와 절을 둘러싸고 나서 다시 불암산 정상으로 향한다.

 

파치파치: 불암산의 능선에 오르면 존암사에서 오르는 길이 어렵다고 파치파치의 이름이 붙어 있다. 여기서 좌능선을 오르면 불암산 정상에 오르고 우능선으로 내려가면 불암산성으로 가는 길이다. 왼쪽 정상의 길을 따라 오른다.

 

불암사 갈라진 길 : 보통 바위봉 바로 앞 오른쪽에 남양주로 내리는 길 불암사로 내리는 길이다. 여기에서 정상까지는 바위 배가 이어지는 길이다. 산에는 지금 한창 진달래 꽃이 만발하다.

 

불암산 정상: 불암산 정상은 좁고 가파른 바위로 많은 등산객들에게 발을 들여놓을 틈이 없어 인증샷을 찍기 위해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 부얀산 정상의 구리판

 

* 불암산 정상

 

파치파치의 불암사 방향의 하산도:

 

불암산장:

 

이시카와 바위

 

* 불암산에 올라 찍은 사진으로 언제나 어딘가 신경이 쓰였지만, 오늘 이시카와바위를 올라 마주하면 감개가 무량이군요. 벌써 25년이 지났어요.

 

불암산 정상

 

불암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이다. 서울 근교의 사대 명찰 중 하나로 세조 때 왕성 사방에 왕실의 소원을 하나씩 정할 때 동불에 뽑힌 곳이다. 절 입구 게츠키 아키마에 영조 7년(1731)에 만들어진 천보산 불암사 사비(天寶山佛巖寺事蹟碑)에 의하면 824년(憦徳王16) 옹양산문을 만든 중창, 무학이 삼창했다. 그 후, 성종 때에 중건해, 1782년(정조 6) 서악이 보광명전과 관음전을 중수해, 와즈키 아키라를 다른 장소로부터 이것 지었다. 1855년(철종 6)에 호성·춘봉·혜월 등이 중수했고, 1910년 독성각·야마진카쿠·도하토도가 창건되었다. 1959년에는 가시가 칠성각을 세웠다. 1989년에는 태국과 스리랑카에서 각각 3과 4과의 신신사리를 모셔 신진사리 보탑을 세워 봉안했다. 사원 뒤의 암벽에는 최근 새겨진 아소 산존 불이 있다. 1991년 관음전이 사라졌으나 1992년 중건을 지어 1994년에는 한 주문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에는 김당의 대웅전을 비롯해 제월, 관음전, 칠성각, 경판고, 일주문, 좋음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591호로 지정된 석씨 원류응화사적책자(釋씨원류유화사적책판) 212장의 목판이 있다. 1638년(인조 16)에 왕명으로 역대 스님의 법통을 이어받은 것을 판각한 것으로, 고창선운사와 이 절에만 보존되어 있는 귀중책이다. 이 밖에 경기도류형 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된 379장의 경판 가운데 말판 4종이 포함되어 있다. 최근의 사원 이후, 바위 벽에 조각된 마아 삼정불은 조각 기술이 우아합니다. 부속암자로서는, 창건연대는 같은 약 150년전에 중건된 석천암이 있다. 호인상이 드문 마애화가 있어 석간수도 유명하다. 위키피디아 보물 제2003호 불암사 목조 관음 보살자리 동상 경기도형문화재 제53호 경기도형문화재 제315호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45호 부담사 석조상 3구와 나한도 16구 경기도 문화재 제348호 불암사 목석불상

 

암사사 석조불상 3구와 한나라 불상 16구 한정: 경기도 태부문화재 제345호

 

불암사 경내에서 유일하게 본 문화재 안내판 불암사 경판 : 경기도 타입 문화재 제53호

 

1989년에는 태국과 스리랑카에서 각각 3과 4과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봉안한 신진사리탑

 

역사적 수수료 없음:

 

덴포지로가는 길:

 

텐보사:

 

삼성보군

 

불암산으로가는 길 :

 

불암산 능선:

 

학도 암:

 

학도암마애관음 보살자상: 서울특별시 타입문화재 제124호

 

이윤택 한글 영화 : 보물 1524 이 비석은 묵재문공(李文楗)이 아버지인 이윤택(이윤택)의 무덤을 어머니의 고령신씨의 무덤과 합창해 1536년(중종 36년)에 묘 앞에 세운 묘비다. 이 묘비에는 전면과 뒷면에 각각 묘주의 이름과 그 일대기가 새겨져 있으며 왼쪽과 오른쪽에도 한글과 한문으로 경계문이 ​​새겨져 있다. 이윤택은 중종 때 승문원 부정자를 보냈다. 원래 무덤은 1535년에 타이룽자에 있었지만, 국가가 그 지역을 복구하면서 이장을 해야 했다. 이장을 하면서 아들 이문건이 부모님의 무덤이 다시 파헤칠 수 없도록 비석에 경계문을 새긴 것이다. 비는 사각형의 지주 위에 몸만을 세운 간결한 구조로, 몸의 상변의 양측을 비스듬하게 정돈했다. 서면에는 한글 30자가 기록돼 있지만 이윤택의 세 번째 아들인 이문건이 문장을 만들어 글자를 새긴 것으로 무덤의 훼손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안녕하세요 빌라 가운사 안녕하세요. 지른 비. 강한 사람은 재화를 입는다. 이것은 문장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리놀라. 이 비석은 1968년에 다시 발견되었습니다. 1974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1989년 중계 2지구 택지개발사업으로 1998년 무덤을 도로 밖으로 15m 옮기는 것에 합의해 묘비와 함께 이장을 했다. 2007년대 한국의 보물로 격상됐다. 2012년 도로명 주소를 도입해 왼쪽 옆을 지나는 6차선 도로에 한글비석로라는 이름이 붙었다. 비를 내린 1536년은 흥민정음이 전파된 지 90년이 지난 뒤이다. 문자는 한글창제 당시와 같은 문자에 서민적인 문체로 쓰여져 있다. 남아 있는 한글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아직 한글이 널리 사용되지 않은 시기에 과감히 한글묘비를 세웠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더욱 돋보이며 국어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한글연비는 국어생활사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우선 중종 31년(1536) 당시 한글이 얼마나 널리 알려져 있는지를 증명하는 자료다. 둘째, ‘한글영비’에 새겨진 한글의 서체는 흥민정음이 창제된 직후의 서체, 즉 ‘흥민정음해례본’의 서체와 ‘영비아 천가’ 서체의 중간형 성격을 가진다. 셋째, 이 비석의 문장은 비석의 이름인 비석을 제외하고는 한국의 혼용이 아니라 순국문으로 쓰여 있다. 본격적으로 한글만으로 쓴 문헌은 18세기에도 등장하지만, 이 한글영비는 16세기에 이미 순국문에만 사용된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한글용비는 언해문이 아니라 전국문의 문장이다. 15세기 이후 한문 원문을 번역한 언해문이 한글 자료의 주종을 이뤘지만, 이 한글 영비는 짧은 문장이지만, 처음부터 한국어로 쓰여진 문장으로 한글이 한문 번역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나 감각을 직접 전달하는 도구로 변화한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다섯째, 한글영비에 사용된 국어현상은 이 당시의 언어를 잘 반영하여 당시의 국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위키피디아

 

이윤택 한글 영토를 계속 뒤돌아 도로길을 따라가면 충숙 인근공원의 안내석이 있는 곳 왼쪽에 재실건물이 있어 건물에는 충신증 대홍보 국숭록 대출의정부 자리 의정 겸 영경 연사감 춘추관사행 자헌 대출 공조판서 증충공.

 

벽진 이씨 찬성 공종 중에 현판이 걸려 있었다. 재실문은 잠겨 있었지만 문이 열려 무조건 들어 묘역을 되돌아 본다. 자손이 따라와서 어떻게 왔는지 물어본다. 묘역을 보러 왔다고 하기 때문에, 친절하게 안내해 주세요. 오늘 여기서 자손 모임이 있다고 한다. 후손의 안내로 천천히 묘역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충숙공 이상길묘역 : 서울특별시 타입문화재 제70호

 

정수공

 

선교와 쉬운 무덤

 

이형 무덤

 

이전 무덤

 

이상일묘역을 둘러싸고 구서울 공대건물을 찾는다.

 

강릉동구 서울공과대학 : 국가등록문화재 제12호 이전에는 서울공대 건물이다. 저는 양정고등학교 2학년 때 여기에 수학경시대회가 있어 시험을 보러 처음 온 기억이 새롭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 농촌봉사활동을 하고 몇번이나 들른 곳이지만,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나서 찾아오면 감개가 새롭다. 이전에는 서울 마을 시골에 있었지만 지금은 도시의 한가운데가 되었기 때문에 격세감이 있다.

 

구 서울공과대학 건물을 견학하는 옆에 있는 서울과학기술대학대륙관 건물도 함께 되돌아 본다. 근대화 여정에 함께 구심점 역할을 한 과학기술의 본산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공릉역으로 돌아오자 오늘의 불암산 밑단의 문화재 여행은 오랫동안 잠들었던 기억 가운데 하나를 꺼내는 추억 여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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